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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은 실패가 없다. 들뢰즈는 '실천'을 실패하게 만드는, 결정적 장애물로 '관념론적인 접근'을 지적한다. 관념론자은 세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로 움직이고 있는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고, 저기 아름답고 좋은 곳이 있으니 저기에 가야 한다고만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신봉하는 소위 '좌파'나 '이윤'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 집단인 '기업' 역시도 '관념론적인 접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비록 '유물론'이 그리고 '이윤'이라는 지향점 자체가 철저히 '비관념적'이라고 하더라도, 구성원 한명 한명의 심층에서 How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형성되지 않은, 이른바 '관념적인 상태'에서는 지속가능한 실천이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들뢰즈의 처방은 세가지이다. 우선,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도대체 어떻게 .. 2024. 10. 31.
문제 해결의 원천 'Ballast' 회사라는 공간에서 해결해야하는 과제 또는 문제상황에 부닥치게 될 때, 그 과제 또는 문제상황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크게 세가지로 구분된다.❶ '경험'을 사용하는 방식자신의 과거 경험의 틀에 '새로운 과제'를 끼워맞추어서 '이것은 마치 내가 과거에 경험한 000와 같은 과제이다'라고 이해하는 방식이다.❷ '지식'의 사용하는 방식선진 방법론 또는 유명한 학자의 이론의 틀에 '새로운 과제'를 끼워맞춘다. '000이론에 비추어 이 문제를 구조화하면 ***한 것으로 파악된다'라고 이해한다.❸ '논리'를 사용하는 방식..인과관계를 찾고, 어떤 메커니즘으로 현상이 만들어졌고 움직이는지를 분석한다.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뜯어보니 이 문제는 @@@로 재구성할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경험의 구조로.. 2024. 10. 31.
대중은 실제로 무엇을 욕망하는가? 아담스미스와 마르크스는 대중의 욕망을 서로 다르게 이해한다. 마르크스는 기득권을 이미 보유한 가진 자와 일반 서민 대중이 역사를 통해 투쟁해왔으며, 일반 서민 대중은 기득권을 혁파하고 싶은 욕망을 때로는 은밀하고 때로는 공공연하게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반면에 아담스미스는 세상 대다수의 대중들은 부와 권세의 찬미자이고 숭배자이며, 부자와 권세가의 지위에 오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사회의 질서를 지탱하고 있다고 본다. 즉, '계급의 업압'이 힘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강요되었다기 보다는, 기득권 계층에 대한 '무산계급'의 찬미와 숭배가 신분 구분과 사회 질서를 재생산하고 있다는게 아담스미스의 시각이다. 이제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 있는 일반 서민 대중은 왜 기득권 계층을 숭배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 2024. 10. 31.
거울 단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엘리트들 라깡에 따르면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면서 비로소 타인과 구분된 주체로서의 '나'를 발견한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유아기의 사람에게 '나'와 '세계'는 모호하게 섞인 감각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거울을 통해 나의 범위를 확인하고 나의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라깡이 제기하는 문제는 '거울'은 그저 거울일 뿐 '나'일 수는 없으며, 역시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역시도 가상의 허구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동물원에 거울을 갖다 놓으면 동물들은 거울 주위를 신기한 듯 둘러보며 관찰하다가 자신과는 관계없는 사물로 판단하고 떠나지만, 사람은 거울을 통해 비쳐진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 자신이 아닌 것을 자신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이 필연적으로 봉착하는 자아분열적 상황이 .. 2024. 10. 31.
나는 누구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함은 각기 그때마다 '나는 하나의 세계 안에 있다'로서의 '나'인 그런 존재자를 의미한다.나는 '나는 사유한다' 일뿐만 아니라 또한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이다."- 하이데거 "이 어떤 것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 이해된다면 그것에는 무언 중에 세계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가 항상 '어떤 것을 생각하는' 자아라면 바로 세계가 '자아'의 존재구조를 함께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라고 말한다'고 말할 경우 자아는 이미 '나는 어떤 세계 속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박찬국, '존재와 시간 강독' 데카르트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나는'과 '생각한다' 사이의 목적어의 부재를 지적한다. '무엇.. 2024. 10. 31.
4분의 저주 1950년대 세계 육상계에서는 인간은 1마일(1.6km)을 4분 이내에 달릴 수 없다는 통설이 진리처럼 받아지고 있었다. 당연히, 4분의 벽을 깨는 육상선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의대생이었던 로저 배니스터가 1954년 5월 6일 3분 59초 4를 기록하여 최초로 4분의 벽을 돌파했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로저 배니스터가 4분의 벽을 넘은 후 한달만에 10명, 1년 후에는 37명, 2년 뒤에는 300명이 오랫동안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4분의 한계를 극복했다. 육상선수의 훈련법이나 신체능력이 갑자기 향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심리적 한계의 실체없음이 로저 배니스터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진 것 뿐이다. 나에게도 한계로 작동해온 그 실체없는 '4분'은 과연 어떤 것들이 .. 2024.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