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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단상

나는 누구인가?

by pied_piper33 2024. 10. 31.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함은 각기 그때마다 '나는 하나의 세계 안에 있다'로서의 '나'인 그런 존재자를 의미한다.
나는 '나는 사유한다' 일뿐만 아니라 또한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이다."
- 하이데거
 
"이 어떤 것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 이해된다면 그것에는 무언 중에 세계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가 항상 '어떤 것을 생각하는' 자아라면 바로 세계가 '자아'의 존재구조를 함께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라고 말한다'고 말할 경우 자아는 이미 '나는 어떤 세계 속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박찬국, '존재와 시간 강독'
 
데카르트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나는'과 '생각한다' 사이의 목적어의 부재를 지적한다.
 
'무엇을'이 빠져 있는 '생각한다'는 실체가 없는 허언일수 밖에 없다.
 
그런데, '무엇을'은 기본적으로 내가 만든 것이 아니며, 세계 속으로 내던져진 내가 오감을 통해 경험한 '세계 또는 타인 또는 사물'이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하니까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세계 속에 존재하니 생각이 가능해진 것일까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질문 앞에서 하이데거는 '생각' 보다는 '존재'의 손을 들어 준다.
 
우리는 '세계 내 존재'로서 나의 '존재' 현상을 궁금해할 수 밖에 없다. 즉, '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계'라는 존재의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말해, 내가 믿고 있던 본질적인 '나'라는 것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니 변해가는 세계 속에서의 '현재의 나'를 끊임없이 재정의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세계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내가 믿고 있는 나는 나로 부터 또는 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를 지적 받을 수 밖에 없고, 나 스스로도 '나의 상실'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상실한 나를 되찾기 위해 '나를 되찾기 위해 본래의 나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지만, 레비나스는 '나'로 돌아가는 것,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무의미하며 계속 '떠나라'고 요구한다.
 
나의 상실을 경험했다면, 어디든 여기서는 벗어나야 하는 것이니, 돌아가자와 떠나라는 모두 같은 얘기일 수 있다.
 
이 얘기를 '기업 경영'에 적용해보면 어떻게 될까?
 
가장 간단하게는 '우리 회사는 ~~~한 회사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에 대해서 보다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즉, 과거의 경험 그리고 역사의 누적으로 오늘의 '우리 회사'를 정의할 수 없다.
 
과거의 경험과 역사의 누적은 참고사항일 뿐이니, 변해 있는 기업 환경 또는 시장의 맥락 속에서 '우리 회사'의 현재를 정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회사'가 가진 현재의 가장 냉정한 status를 설명할 수 있는 주체는 회사의 '자료 기록실'이 아니라, 어쩌면 시장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분석하는 'Market Sensing 부서'이거나, 이미 시장 변화 위에 올라타 있는 '신기술 부서'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업은 자신이 가장 많은 과거의 경험과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는 근거있는 믿음으로 인해 '목적어'가 결여된 자신의 '생각하는 능력'을 의지하여, 과거의 좌표로 현재를 규정하고 그 좌표의 연장선상에서 회사의 미래를 계획할 가능성이 높다.
 
이로 인해 발생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병폐는 구성원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비젼 부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계 내 존재로서 '자아의 상실' 또는 '좌표의 상실'은 '길 잃음'으로 이어지는게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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