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385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죄수의 딜레마'는 협력을 하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이익이 극대화됨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배신을 하고 나는 협력을 했을 때 즉, 상대는 영리하고 나만 호구가 되었을 때 겪게 되는 낭패의 가능성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두 '배신'을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행동이 귀결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그렇지만, 이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사람들의 행동은 어떻게 바뀔까?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A는 언제나 협력을 하는 사람이고, B는 쉽게 배신하는 사람이라는 정보가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A와는 협력을 하고 B와는 협력을 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된다.문제는 세상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언제나 협력만 하는 사람도 없고, 배신만 하는 사람도 없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른 선택.. 2025. 3. 18. 논어 - 리더가 저지를 수 있는 네가지 잘못 어떤 리더가 나쁜 리더일까..를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만났던 여러 보스들의 모습과 더불어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실수들이 눈 앞에 떠오르면서 얼굴이 화끈해진다. 논어의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챕터 '요왈편'에서 공자는 네가지 유형의 나쁜 리더의 모습을 보여준다. ❶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고도 잘못을 지적하고 학대한다❷ 미리 주의를 주지도 않고서도 나중에 결과만 보고 판단한다❸ 지시를 명확하게 하지도 않고 빨리 완성하라고 재촉한다❹ 성과를 보상으로 고르게 나누어주지 않는다 일을 시키기 전에 리더가 해야하는 세가지 의무와 일을 시킨 후에 해야하는 한가지 의무로 정리될 수 있겠다. 이 네가지 의무에 태만하면 나쁜 리더가 되는 것이다. 기억해보면,화를 쉽게 내는 리더들 대체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세하게.. 2025. 2. 11. 논어 - 악을 덕으로 갚다니...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 대해서 착한 덕으로 갚아야 합니까?" 논어 헌문편에서 이 질문을 받고 공자는 질문자에게 되묻는다. "그렇다면, 나에게 착한 덕을 베푼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갚아야 합니까?" 공자는 착함으로 악함에 대응하는 것에 대해 명확하게 반대한다. "원한은 그릇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갚고, 은혜는 은혜로 갚아야 한다" 실용주의적인 냉정한 판단이다. 나에게 원한을 끼친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릇된 것을 바로 잡아야하는 목적이 있을 때로 제한한다. 그리고 바로 잡아줄 필요가 없을 때는 그냥 잊어버리는게 상책이다. 굳이 내 아까운 시간을 투입하여 악을 악으로 복수할 필요없고, 악을 덕으로 갚아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2025. 2. 10. 논어 - 확신의 딜레마 사회생활의 나이테가 많아질수록 그리고 겪어낸 사람과 읽은 책이 쌓일수록, 무언가를 확신하고 그 확신을 말로 뱉어내는게 힘겹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가야하는 길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져야만 하기도 하니, 이런 딜레마가 없다.공자는 논어 헌문편에서 '자신의 말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실천해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其言之不怍 則爲之也難)실천은 끊임없는 반성의 과정이다. 일찌기 독일 제국의 군사전략을 기초한 몰트케가 '적과의 첫 접촉 이후까지 살아남는 계획은 없다'라고 주장한 것도 이와 맥락이 연결된다.현재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수용해서 프로세싱하는게 불가능하고, 미래의 환경 변화를 예측하거나 상대방의 머리 속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 역시도.. 2025. 2. 10. 맹자 - 가르칠 수 있는 사람2 팽갱이 맹자에게 묻는다. "아무리 왕이 선생님께 가르침을 부탁했다고 하더라도, 수백명을 끌고 찾아가서 얻어먹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타당한 지적이다. 왕은 맹자를 만나고 싶었을 따름이니, 거지꼴을 하고 따라온 무리까지 먹이고 재우는건 도리에 맞지 않아보인다. 여기서 공자와 맹자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공자가 순리를 따라 개는 개대로, 걸은 걸대로, 윳은 윳대로 활용하는 지혜를 설파했다면, 맹자의 접근은 '모'아니면 '도'였다. 즉, 민심은 천심인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현실 공간에서의 권력을 쥐고 흔드는 '왕'이 순리를 깨닫지 못하고 엉망으로 국가를 경영한다면 세상이 평화로워지기 만무하니, '왕'을 직접 가르쳐서 깨우쳐야 한다는게 맹자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공자의 육포 한꾸러미.. 2025. 2. 9. 논어 - 가르칠 수 있는 사람1 내가 먼저 배우고 깨달은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해서 돕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좋은 의도로 시작한 가르침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유쾌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때도 많다. 오히려 가르쳐주려는 선의의 접근이 간섭과 지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쉽다. 듣는 사람에게는 '귀찮음'이 되고 도우려는 사람에게는 '상처'로 남는다. 공자의 시대에도 이런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논어 술이편에서 공자는 아무에게나 가르침을 주지 않으리라고 선언한다. "배우려는 열의를 보이지 않으면 일깨우지 않고, 스스로 애쓰지 않으면 끄집어내주지 않는다 (不憤不啓 不悱不發)" 그렇다면, 열의와 애씀은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육포 한꾸러미 이상을 들고 온 사람에게 나는 가르침을 거절하지 않는다 (自行束脩以上 吾未.. 2025. 2. 9. 이전 1 2 3 4 ··· 6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