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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단상

도덕의 쓸모

by pied_piper33 2024. 10. 15.
송나라와 초나라가 강을 가운데 두고 대치하고 있다가, 초나라가 도하를 시도하며 먼저 공격을 감행한다.
신하가 송나라 왕인 송양공에게 공격 의견을 개진한다.
"초나라는 우리 송나라보다 군사의 수가 훨씬 많습니다. 적이 아직 강의 절반도 건너지 못해서 전열을 갖추지 못한 상태이니, 지금 공격하면 무찌를 수 있습니다"
송양공은 이 의견에 반대한다.
"군자는 다친 사람을 살상하지 않고 상대가 불리한 처지에 있을 때 공격하지 않으니, 강을 건너는 중에 있는 초나라를 공격하면 의를 해치게 된다. 반드시 초나라 군사들이 모두 강을 건넌 후 전열을 갖추게 되었을 때 북을 울려 진격하라"
전쟁의 결과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다. 송나라는 전쟁에 패하고, 송양공도 부상을 입어 죽고 만다.
한비자 '외저설'에 나오는 얘기다.
한비는 송양공이 군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인의도덕의 실천'이라고 정의한 것에서 패배의 원인을 찾는다.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을 하지 않아도 행해질 것이요,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하더라도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타이르고 감싸고 가르치고 깨우치면 아전들 역시 사람의 성품을 타고난지라 바로잡히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 정약용 '목민 심서'
한비의 시대가 끝나고 2000년의 긴 세월이 흐른 뒤 정약용이 태어났지만, 정약용의 생각도 한비가 비판한 송양공으로부터 딱히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 이를 사람의 성품이 본래 선하다 또는 악하다..는 방식의 도덕에 관한 이슈로 몰아가면 곤란하다.
도덕 이전에 조직을 구성하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역할 또는 기능이 있는 것이다. 그 역할과 기능에 있어서 '군주'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무릇 군주 자신이 직접 행한 뒤 백성이 듣고 따르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면 장차 군주가 스스로 밭을 갈아 먹을 것을 얻고 전쟁터로 나가 싸워야만 백성들도 따라서 농사짓고 싸우는게 된다. 그리되면 군주는 너무 위험하고 신하는 너무 편하지 않겠는가?" - 한비자 '외저설'
한비는 도적적 관점에 의거한 '솔선수범'의 의미를 일축한다.
자신이 해야할 역할 또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역할을 도외시 한채, 백성이 할 일에 대해서 군주가 '솔선수범'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바른 과녁을 무시하고 멋대로 활을 쏘면 비록 적중할지라도 재주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 한비자
그렇다면, 군주(리더)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신하는 자신의 능력으로 직책을 받는 것을 편안해 하지만, 홀로 두가지 일을 책임지는 것은 고통스러워 한다. 명군은 신하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제거하고,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세운다. 군신간의 이익으로 이보다 나은게 없다"
즉, 군주는 '권력'이 있을 뿐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군주의 역할은 '일'을 하는 신하가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장애물을 제거하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그 댓가로 신하는 성과와 봉록을 얻고, 군주는 명예와 권력의 유지 및 강화를 얻는다. 군주와 신하는 서로 완전히 다른 '욕망'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한쪽의 '욕망'을 상대방에게 적용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신하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군주의 적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통치자는 이러한 귀족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하며, 그들이 마치 공인된 적인 것처럼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군주가 역경에 처하면 언제라도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다 쓸 것이기 때문이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
정약용의 '솔선수범'이 현실에서 무력한 이유는 바로 여기, 서로 다른 욕망의 메커니즘을 무시한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도덕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도덕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윤리로서 기능할 때만 그 중요성이 인정 받을 수 있다.
의사는 환사의 고통에 같이 울어주는 것으로 역할이 완성되는 직업이 아니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냉정을 유지하고 최선의 의술을 발휘하는 사람이고 의사의 도덕은 그 치료를 위해 환사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도덕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역할'의 중요성을 희석시키고, 궁극적으로 작은 도덕적 상처에도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을 무대에서 퇴장시킬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인 사람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비극을 초래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