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읽기의 즐거움

나를 보내지 마 - 가즈오 이시구로

by pied_piper33 2024. 10. 13.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는 장기이식을 목적으로 사육되는 인간(클론)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육자들이 클론들을 속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를 보내지마’는 영화 ‘아일랜드’와는 출발점에서부터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사육자은 클론들에게 너희들의 삶의 목적이 ‘일반인’들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함이라고 명확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설명해주고, 클론들 역시도 그러한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사육자들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클론들의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클론들이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고 성장하도록 해주고, 성인이 되어 장기를 기증하고 난 이후에는 회복을 위해 요양기관에서 치료받도록 해주고 전담 간병사로부터 정서적인 돌봄까지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회복 후에 클론들을 기다리는 것은 클론이 아닌 인간 즉 일반인들을 위한 2차 3차 기증이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클론들에게는 이러한 삶과 죽음의 모습이 특별히 이상하지도 억울하지도 않다.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모든 과정을 따뜻하고 차분하게 묘사한다. 갈등을 고조시키지도 부당함과 울분에 숨이 떨리게 만들지도 않는다. 우리와 다를바 없는 클론들의 삶 속에 간간히 ‘기증’, ‘완결’, ‘일반인’, ‘장기’와 같은 낯선 단어들을 삽화처럼 끼워놓을 따름이다.
유전공학의 비윤리성이 이 소설을 통해 가즈오 이시구로가 말하고 싶은 주제는 아닌 듯 보인다. 
운명이 타인에 의해 규정지어진 슬픈 존재와 그 운명에 대해 저항할 줄 모르고 그저 순순히 받아들이는 그들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젠틀한 체계와 제도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지배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마는 이면의 폭력을 은밀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소설에서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안나카레리나의 제목이 안나카레리나가 아니라고 해서 그 소설의 내용과 주제가 훼손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를 보내지마’에서 제목을 뺀다면 책의 절반이 아니 그 이상이 없어지고, 아예 다른 책이 되어버릴 수 있다. 
소설 어디에도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 ‘나를 보내지마’라는 그 숨죽인 울음을 듣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해"
"너희 중 아무도 미국에 갈 수 없고, 너희 중 아무도 영화배우가 될 수 없다. 또 일전에 누군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겠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너희 중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랑도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가 정해져 있지.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얼마 안 있어 헤일셤을 떠나야하고, 머지않아 첫 기증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해.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

 

*조각가 권진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