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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즐거움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 이경란

by pied_piper33 2024. 10. 13.
처벌없이 한명을 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구를 죽이고 싶은가?
이경란 작가의 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의 등장인물 이안은 장래희망이 '닌자'였다고 얘기하는 자신보다 서른살 쯤 어린 실업자 청년에게 죽이고 싶은 사람의 인상착의와 출몰하는 장소를 알려준다.
양재역에서 회사 출퇴근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머리숱 많고 배 나온 중년남자다.
정말 죽일 것도 아니면서, 닌자는 이안의 설명에 집중한다. 그리고 자신이 닌자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어떤 수련을 해왔는지 증명하기 위해 나무에 매달렸다가 넘어져서 망신을 당한다.
사실, 그 중년남자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이안의 10년전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전력질주 끝에 멈춰 서보니 트랙이 보이지 않는다. 결승선은 어디쯤 있을까. 어떻게 가야할까. 이안은 드넓은 운동장 복판에 홀로 선 느낌이다."
25년이나 직장생활을 했으면, 높은 지위에 올라가지는 못했더라도 그래도 어느 한 분야에서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장인이 되어 있어야 할텐데, 회사만 바라보고 달려온 이안의 지난 25년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회사의 노골적인 퇴사 압력을 버티어야 하는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 버렸으나,
그는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다. 잠시 가출 아닌 가출을 하는 동안 가족은 이안을 버리고 해외여행을 떠났다. 가족에게도 이안은 사실 귀찮은 존재가 된 것이다. 이안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을까..
작가는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이안을 위해,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 속에 희망의 씨앗을 심는다. 가라타니 고진은 살만한 세계가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수 전제 조건으로 '떠남의 자유'를 제시한다.
떠나고 싶을 때 아니 떠나야만 할 때, 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 살만한 세계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살만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라면 희망도 어쩌면 무의미하다.
이경란 작가가 창조한 세계 속 이안을 포함한 네명의 루저들은 근근히 버티던 초라한 삶 마저도 유지하지 못하고 아파트 철거라는 저항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떠남'에 내몰린다. 그리고 변한 건 하나도 없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각자 그리고 손잡고 길을 떠난다.
궁금하다. 이경란 작가가 창조한 세계는 희망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시뮬라크르인가 아니면 존재할 수 있는 '희망'의 가능성을 작가는 정말로 믿고 있었던 것일까..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생존과 사망의 중첩 상태에 놓여있던 것처럼 희망 역시도 존재와 비존재의 중첩 상태인 것인가..
가라타니 고진도 맞고 이경란 작가도 맞다면 떠남에 내몰리는 절망이야말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자에게는 떠남의 기회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여기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일단, 나는 '희망'이라고 부르기로 마음 먹는다.
 
- 2022.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