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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즐거움

항우와 유방 - 시바 료타로

by pied_piper33 2024. 10. 13.
유방이 장량에게 총사령관의 지위를 부여했다.
장량은 유방의 믿음에 부응하여, 총사령관으로서 수행한 첫번째 싸움에서 멋지게 승리한다. 그런데, 장량은 그 승리 후에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유방에게 반환해버린다.
이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장량은 왜 바로 그 자리에서 내려오기를 결정했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장량은 승리의 과정에서 '소하'와 같은 뛰어난 인재들의 창의성과 주도성이 약해지는 것을 관찰했다.
"유방의 재기넘치는 참모들은 장량의 뜻을 가늠하느라 지쳐서 결국 그 명령대로만 움직일 뿐, 자신의 창의적인 능력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후방 보급과 군정에서 장량 이상의 능력을 가진 소하에게 끼친 나쁜 영향은 더없이 컸다"
"장량의 작전은 정과 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복잡한 양상을 띠었기 때문에, 소하는 어디로 보급해야 할지를 몰라 결국 악의는 없었지만 태업상태에 들어갔고, 장량이 일일이 후방으로 전령을 보내 지시를 내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장량도 피로했고, 소하도 피로했다"
"제가 지휘하면 두세번 승리하여 사기는 올릴 수 있지만, 마침내 다른 요인 때문에 전군이 나태해질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전군이 자멸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즉, 몇번의 싸움이 아닌 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재의 종합적인 공헌이 필요했으나, 자신의 리더쉽으로는 그것을 만들어낼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의 신임을 얻어서 총사령관이 될 수는 있었으나 지위의 획득이 목표의 끝이 아니었던 장량은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 모두가 부러워하는 지위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장량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솔직하게 노출하면서 유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장단점을 파악하게 할 뿐만 아니라, 후일의 안전까지도 도모할 수 있었다.
항우와 유방의 승부는 어쩌면 여기에서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유방이 아무리 많은 인재를 보유했더라도 인재들이 서로 조화되지 않는다면 범증을 원탑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 항우에 비해서 더 나을 것은 없었을 것이다.
난이도가 높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재를 모을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자기 객관화' 능력과 그것을 솔직하게 노출할 수 있는 '인품'이다.
물리적인 '강점' 또는 퍼포먼스 상의 '장점'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경우, 성과를 추구하는 진짜 인재와 지위를 추구하는 가짜 인재를 구분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제갈공명과 장량 중에 누가 더 뛰어난 전략가인지에 대한 오랜 질문의 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경영은 실행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관우를 죽도록 내버려 두었고 결국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한 제갈공명은 헛똑똑이의 전형일 뿐이다.
낭만적인 패배는 소설 속에서나 아름답다.
*인용부호("") 속의 문장은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