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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즐거움

순교자 - 김은국

by pied_piper33 2024. 10. 13.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의 작중화자인 김대위는 세계가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 흘러가는 이유가 진실의 은폐, 즉 거짓에 있다고 믿고 있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유엔군은 평양을 버리고 남으로 철수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김대위는 그 작전의 비밀을 알고 있다. 
앞으로 버려지게 될 평양의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군은 사용하지 않을 진지를 구축하고 비행기를 동원하여 삐라를 살포한다.
"우리는 곧 중공군을 압록강 북쪽으로 쫒아내고 전쟁을 끝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는 김대위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니,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신목사가 설교하는 교회를 찾아가서, 군은 이미 평양을 버렸으며 평양은 다시 공산군의 치하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기독교 목사인 당신과 신도들은 고초를 겪고 죽게 될 것이라는 금단의 '진실'을 폭로한다. 
'진실'의 부재가 부조리의 원인이라고 믿었던 김대위의 기대와는 달리 신목사는 진실을 접하고 나서도 피난을 거절한다. 
신목사에게는 '진실의 부재'가 부조리의 원인이 아니었으며 '떠날 수 없음'이 부조리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세상을 보다 살만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 삶을 바쳐서 실천하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의 힘을 믿고 있으며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진실은 공허한 외침으로 들린다. 
여기가 지옥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도 앞으로 더한 지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결국 영원히 떠날 수 없다는 어쩌면 너무나 자명한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쉽지 않다. 
데모크라시의 한계를 지적한 가라타니 고진에게 있어서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첫번째 열쇠는 김은국의 소설에서와 같이 '떠날 수 있음'이었다.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도 '진실'은 필요하지만 떠남에 대한 소망과 떠남을 위한 미약하나마 작은 실천이 없는 상태에서의 '진실'은 고문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없이는 떠남의 계기 조차마련될 수 없으므로 진실을 향한 신념과 행동은 여전히 소중하다. 
다만, '진실'의 허약함에 대한 이해없이 '진실'을 맹신한다면, '진실'이 필요하고 '진실'에 의해 떠나야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거짓'이 합법적으로 '진실'에 대해 승리하는 비극을 반복적으로 목도할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