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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즐거움

숙적 - 엔도 슈샤쿠

by pied_piper33 2024. 10. 13.
소설 '숙적'의 마지막에 이르러 고니시 유키나가가 처형될 즈음, 저자 엔도 슈샤쿠는 고니시의 지난 삶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한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자신이 지금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가를 깨닫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인생 자체가 형틀에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사카이 상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어 외견상으로는 화려하게 영주로까지 입신양명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히데요시의 의사대로 움직인 것 뿐이었다.
싸움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오로시 히데요시의 명령이라는 형틀에 채워져 오늘날까지 지내온 것이다."
'숙적'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은 상인의 자식으로 태어난 전략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타고난 장수였던 가토 기요마사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다룬다.
그런데, 소설이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약간 이상해진다.
가토는 고니시의 군사적 무능을 무시하고 비난하지만, 고니시는 딱히 가토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니시와 가토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그들이 서로 경쟁하며 자신에게 충성하기를 바랬고, 그 둘의 인연은 그렇게 '숙적'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고니시의 싸움은 가토를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고니시가 싸워야할 숙적은 가토가 아니라, 신앙(천주교)을 버리도록 강요하고 무의미한 전쟁(임진왜란)으로 내몰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가토는 끝까지 도요토미를 향한 충성 경쟁에서 고니시를 숙적으로 여기지만, 도요토미에게 충성하지 않는 고니시에게 가토는 숙적일 수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라는 '형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은 고니시에게 무의미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 있어서 숙적은 형틀 속에서 나에게 칼을 겨누는 가토 기요마사가 아니라, 형틀을 고니시와 가토에게 강요하고 목숨 바쳐 충성하도록 세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래서, 결국 이 싸움에서 누가 이겼을까..
고니시 유키나가도 죽고, 가토 기요마사도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상이 되었으니, 도쿠가와가 게임의 승자가 된 것일까..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으니 승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