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의 한 장면이다.
이아손은 아내 메데이아와 두 자식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 권력자인 여자의 아버지는 메데이아가 자신의 딸에게 해코지할 것을 염려하여 메데이아에게 추방 명령을 내린다.
메데이아는 미칠 듯 괴로와하다가, 여자와 여자의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두 자녀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모든 것을 잃은 이아손은 복수를 위해 메데이아의 집 문을 두드린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이었다면,
이아손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서 발생된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 속에서 괴로와하다가 용서받지 못할 악녀 메데이아를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식의 결말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는 여기서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종결짓는다.
태양신이 메데이아에게 수레를 내려주고 메데이아는 하늘에서 내려온 그 수레 위에 올라탄채, 자신을 죽이러 온 이아손을 맞이한다.
예상치 못한 신의 개입으로인해 이아손은 메데이아에게 이제 복수를 할 수 없다.
메데이아가 이아손에게 말한다.
"너는 내가 겪은 일이 (여자라면 마땅히 감내해야 하는) 작은 것이라고 여기느냐?"
"분명히 알아두기 바란다. 자식이 죽은 것은 내게도 슬픈 일이지만, 네가 웃을 수 없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아픔도 내게 이득이 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의 고통, 그것뿐이다"
너무나 어렵게 꼬여버려서 어찌할 바를 알 수 없는 한계상황에 부닥쳤을 때 인간에게 필요한 솔루션은 (이미 슬픔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절치부심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해 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루어내는 것보다는) 인간의 슬픔에 공감해주는 현명한 신이 하늘에서 짠 하고 내려와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이런 방식의 시원한 해결을 맛보는게 불가능하니, 문학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만이라도 그러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도록 에우리피데스는 그것을 자신의 비극 속에 담아두었다.
에우리피데스가 만들어 놓았던 그 솔루션.. 'DEUS EX MACHINA'는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현실적으로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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