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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즐거움

네가 있어야 할 자리 - 하비콕스 '신이 된 시장'

by pied_piper33 2024. 10. 25.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냈다. 고대 금송아지 숭배가 돈에 대한 맹목적 숭배로 돌아왔다. 이런 체제에서는 환경같이 허약한 것은 무엇이든지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무방비 상태가 된다."
- 프란치스코 교황

종교학자 하비 콕스는 책 '신이 된 시장'에서 종교학자의 시각으로 21세기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시장'이라는 것을 재화를 유통하고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하기 위한 '수단' 또는 '도구'로 간주하기 보다는 그 자체로 신성하여 '오류'를 상상할 수 없는 '신'으로 섬기고 있다고 꼬집어 지적한다.

기독교, 불교, 샤머니즘 등 각 개인이 표면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종교가 무엇이든간에 궁극적으로 수렴하는 지점에 위치한 공통의 신은 결국 '시장'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종교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시니컬한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시장'이라는 궁극의 신의 현존 앞에서는 공손해지는 현상을 의아해한다.

시장과 신에 대한 하비콕스 분석은 참신하고도 재미있다.

하비콕스의 얘기 중 한 꼭지를 따라가 보자.

기독교의 신이 자유의지를 가졌으나 죄로 인한 불가피한 형벌에 노출된 인간을 창조했다면, 시장이라는 새로운 '신'은 생명이 있으되 죄로부터 유한한 책임만을 부여받음으로 한 걸음 더 앞선 자유를 누리는 '법인'을 창조했다.

"신은 불사의 존재다. 이제 새로운 인간을 보라. 현대의 법인을 보라. 지난 세기에 장황하게 얽힌 법률과 판례를 통해 등장한 현대의 법인 기업은 제우스나 아테나 같은 올림포스산의 지위에 다다랐다. 법인 기업은 마법의 영약이나 청춘의 샘,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다." - p.63

"다우케미컬이 유니언카바이드를 인수햇다. 다우는 (독극물의 유출로 인도 주민 2만명을 사망하게 만든) 보팔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을 부정하면서 생존자에게 배상하거나 여전히 가스의 영향을 받는 지역을 정화하는 일을 거부했다. 다우는 이제 유니언카바이드가 존재하지 않는데, 있지도 않은 회사에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고 주장했다."

"시장은 방해받지 않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지켜지고 향상되는 한, 고상한 욕망과 저열한 욕망을 구분하지도 않는다. 이론적으로 볼 때, 엄밀한 의미의 시장은 당신이 선택한다는 사실에 관심이 있다. 그런데 광고업자들은 당신이 선택하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인다."

"시장은 정해진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간이 구성한 제도이며, 많은 경우 시장은 이런 역할을 잘 수행했다.(하지만) 시장은 자신이 거둔 경이적인 성공의 희생양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허약한 기획의 다른 측면에 심각한 손상을 주었다. 그 결과 시장은 원래 의도된 목적에 이바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족과 예술, 교육과 종교 같은 다른 중대한 제도에 끼어들어 왜곡하고 있다."

법의 보호 아래에서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나, 책임은 유한한 '법인'에게 우리는 사실상 '감수성'과 '도덕'을 기대할 수는 없다.

시장이라는 새로운 신과 그들을 섬기는 사제 그리고 기업이라는 성전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서 성선설에 입각한 인간의 도덕성은 개인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이에 하비콕스는 신의 위치로 올라서서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린 시장을 다시 '수단'의 자리로 돌려 놓자고 제안한다.

"시장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인간인 우리가 그 체제를 건설했으며, 우리가 원하면 개편하거나 해체하거나 변형할 수 있다. 그 체제에 손을 얹는다고 성궤에 손을 대는 것과 달리 바로 죽음에 이르는 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에서 성스러운 아우라를 걷어내야 한다. 우리는 '시장'의 신전에 들어갈 때 신발이나 모자를 벗을 필요가 없다."

어떻게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비콕스는 종교학자다운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구원은 언제나 회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회복을 추구하는 당사자는 자기 방식의 오류를 인정하고,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회개라...

그렇다면, 시장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무엇을 고백하고 무엇을 참회해야 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시장 옹호자와 완전한 경쟁을 고집하는 그들의 태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난은 그들이 자신의 복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쟁을 찬미하면서도 경쟁을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스스로의 위선을 인정하라는 얘기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듯 하다.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완전경쟁, 완전정보, 합리적인 소비자 등이 전제되어야 하고 현실적으로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지 않는 (일부러 무너뜨리는) 상황이 수없이 발생되기 때문에 주류 경제학에서도 '시장 실패'라는 현상을 매우 중요한 챕터의 하나로 경제학 수업의 커리큘럼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위선을 인정할 만한 근거는 이미 충분하다. 그럼에도 신성불가침이 유지되고 있을 따름이다. 믿음에 대한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정의'는 매우 매력적이고 동시에 적확하다.

인간이 시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시장이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도구의 위치로 돌아올 수 있다면, 이제 시장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분석과 판단 그리고 조정의 대상이 된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죽음의 자리에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고 한다.
'아아 슬프도다. 지금 내가 신이 되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