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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즐거움

기본이라는 이름의 폭력 - 김동식 '회색인간'

by pied_piper33 2024. 10. 25.
핵전쟁으로 지구는 폐허가 되었고, 인류 대부분은 폐허에 내버려진 반면 제한된 일부 소수는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안전지역을 만들어서 살고 있다.

소년과 소녀가 등장한다.

소년은 안전지역을 찾아가는 떠돌이 무리의 일원이다. 어느날 소년은 무리가 가는 방향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고, 무리가 보유한 식량의 전부인 들쥐 네마리와 통조림 세개를 훔쳐서 무리를 이탈한 후 안전지역을 향해 홀로 걸어간다.

소녀도 병든 엄마와 둘이서 안전지역을 찾아가는 중이다. 엄마는 가슴에 품고 있던 초코바 하나를 꺼내어 생일선물이라며 딸에게 주고 숨을 거둔다. 딸은 그 엄마의 유품인 초코바를 먹지 못한다. 그리고 안전지역을 향해 길을 떠난다.

소년과 소녀는 결국 안전지역의 문 앞에 도착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소년과 소녀는 호소한다. 하지만, 제한된 인원에게 최적화되어 있는 안전지역의 여건으로 인해 안전지역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안전지역에서 사는 사람들도 인정이 있는지라, 지도자에게 문을 열어주기를 간청하고 지도자는 한명만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누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사실 누구를 죽일 것인가와 같은 얘기다.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소년과 소녀를 관찰한다.

소년에게는 통조림 한개가 남아있고, 소녀는 아직 엄마의 초코바를 품고 있다. 극한의 굶주림 속에서도 소년은 통조림을 열지 않는다. 소녀는 초코바를 꺼낸다. 소녀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초코바를 반으로 나누어 소년에게도 준다. 소년은 한입에 초코바를 털어넣고 소녀는 울면서 초코바를 한참동안 입 속에 물고만 있을 뿐이다.

이윽고, 지도자는 결정을 내린다.

"소년을 받아들인다."

"다들 지켜보지 않았는가? 소녀는 초코바 봉지를 무책임하게 바닥에 버렸다.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는 것은 도덕적이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켜야할 것은 반드시 지켜야한다."

김동식의 단편소설 '소녀와 소년,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는 안전지역의 사람들이 지도자의 옳은 의사결정에 탄복하여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도 '기본'이라고 규정되어 있는 수많은 의무와 책임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도 지켜야할 것으로 요구되고 있다.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이 '지켜야 할 것' 또는 '기본'은 자연법칙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기본의 내용과 근거가.. 사람과 사람, 국적, 문화적 배경 그리고 세대간에 크게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건 못한다. 이건 기본이잖아'

기본이라는 이름이 붙은 무언가는 합리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대상의 범주 바깥에 자리를 잡기 마련이다.

이렇게 본다면 어쩌면 기본이라는 것은 종교에 가깝다. 인류가 역사를 통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시켜 온 이성, 사유 또는 대화를 무력화시킨다.

김동식 작가의 글을 읽으며, 지도자가 지켜야 할 것으로 결정한 그 '기본'에 대해서 동의하기 어렵다고 느낀 사람이라면,

자신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기본'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고 그것이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본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되어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보편적인 것인지 한걸음 물러서서 들여다 보는 것은 꽤 위로가 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