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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과 CEO

주역과 CEO 33- 천산둔 天山遯

by pied_piper33 2024. 10. 20.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름답게 오래 이어지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삶은 꼭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아름다울 수 없는 관계라면 더 깊어지기 전에 빨리 각자의 길을 가는게 현명하다.
 
주역의 33번째 괘 천산둔(天山遯)은 하늘 아래에 산이 놓여져 있는 형상이다. 얼핏 보면 평화로울 수 있는 모습이지만, 32번째 괘 뇌풍항(震風恒)의 우뢰와 바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함께 변해가는 관계와는 크게 대비된다.
 
하늘이 어떻게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든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평화로워보이지만 이 둘 사이에는 관계맺음이 없다. 시간이 흘러갈 수록 하늘이 지치거나 산이 깎이는 수준의 변화만 존재한다. 이런 방식의 변화는 양자 모두에게 아름답지 않다. 스피노자의 단어를 빌리자면 코나투스(Conatus)가 약화될 따름이다.
 
헤어져야 한다.
 
천산돈(天山遯) 괘가 말하는 헤어짐의 방법을 들어보자.
 
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집지용황우지혁 막지승설
"황소 가죽으로 묶어서 붙잡는다. 도저히 말로 설득할 수 없다"
 
비극적인 관계일 수록 헤어지기 어렵다. 주역의 저자는 이를 황소 가죽으로 묶였다고 표현한다. 어떻게 설명해도 헤어짐을 설득하는게 불가능하다.
 
주역은 두가지 부정적인 헤어짐과 세가지 긍정적인 헤어짐의 모습을 보여준다.
 
遯尾 厲 勿用有攸往
둔미 려 물용유유왕
"속이면서 헤어지면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한다"
 
한자 미(尾)는 갑골문을 보면 동물의 몸에 붙어있는 꼬리가 아니라, 사람의 몸에 붙어있는 동물의 꼬리로 나와있다. 즉, 사람이 (사냥 등의 목적으로) 동물의 흉내를 내는 것이다.
 
이 문장의 둔미(遯尾)는 헤어짐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둘러대는 것을 의미한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한 칼로 끊어내지 못하고 숫돌에 칼을 갈듯이 미적미적 흉내만 내고 있다.
 
헤어짐의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하니 관계는 더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고 옴짝달싹 할 수 없다.
 
係遯 有疾
계둔 유병
"인간관계에 얽메이면서 헤어지면 병을 얻는다"
 
줄 건 주고 포기할 건 깨끗이 포기하면서 헤어져야 한다. 작은 이익에 연연하면 몸과 마음에 고통만 커진다.
 
好遯
호둔
"기뻐하면서 헤어진다"
 
嘉遯
가둔
"아름답게 헤어진다"
 
肥遯
비둔
"살찌우면서 헤어진다"
 
주역은 어차피 헤어지는게 옳다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기뻐하면서 아름답게 그리고 살찌우면서 헤어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헤어짐에도 준비와 연습이 필요한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을 듯 하다.
 
인간은 백년도 못되는 짧은 삶을 살다가 갈 뿐이다. 좋은 인연을 만나서 그 인연 속 좋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기에도 짧기만 하다.
안좋은 인연이라면 빨리 헤어져야 한다.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그리고 아름답게 그 헤어짐에 직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