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위험사회'를 통해 울리히 벡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궁극적으로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핵심적인 동인으로 '위험'을 제시한다.
즉, 근대화가 진행된 이후, 사람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쟁취의 본능보다는 '위험'을 회피하려는 욕망에 의해 자신의 의식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울리히 벡이 제시하는 이 '위험'은 '질병'과 같이 근대 이전의 '과학 기술'이 자연을 통제하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위험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다.
근대성의 일부로서 대두되는 이 위험의 특징을 들여다보면,
첫째, 사람들은 막연한 불안함과 두려움 그리고 고통을 겪고는 있으나, 소위 '전문가'가 그 위험의 모습을 규정하기 전까지는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핵발전소의 위험에 대해서 전문가의 과학적인 논리를 바탕으로 한 경고를 듣기 전에는 그리고 대중매체의 재생산과 확증을 접하기 전에는 일반 대중은 깨닫기 어렵다.
위험은 '지식 권력의 정치학'이라는 특성을 보유한다.
둘째, 위험에 대한 취약계층이 나타난다. 즉 누군가는 위험에 대해 회피할 수 있으며, 또다른 누군가는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셋째, 하지만, 위험의 확산과 심화는 경제 발전을 위축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강화시킨다. 위험에는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며, 승자의 입장에서 '위험'은 거대한 사업거리가 된다.
넷째, 계급과 계급지위에서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반면에, 위험지위에서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다(책 p.59). 즉 위험에 대한 인지 및 자기 자신에게 미칠 파급력에 대한 파악 여부가 의식을 결정한다. 따라서, 위험과 관련한 '지식'의 생산 및 유통이 핵심적인 분석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다섯째, '파국'에 대한 두려움이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 위험의 확산에 의해 피해를 입는 '패자'는 안타깝게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사회를 변혁시킬 힘이 없다.
부를 축적하는 승자 입장에서 '패자'의 영역 안에 가두어져 있어야할 '위험'이 그 울타리를 넘어서 승자의 '부와 권력'을 위태롭게 만들 가능성이 포착되었을 때, 권력과 권위의 재조직이 발생된다. 따라서, 위험사회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파국의 정치적 잠재력이다.
파국의 상황이 도래하면 지금까지는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이 규범의 영역으로 포함되게 된다.
울리히 벡이 제시하는 위험의 사례는 '공해'나 '방사능' 등의 과학 기술의 부작용 수준에 머물고 있다.
독일이라는 나름대로 건강하고 괜찮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 탓일 수도 있겠으나, 울리히 벡의 논리를 사회적인 위험으로 확장시켜 본다면, 나를 포함한 우리 사회 구성원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고통 그리고 수많은 변화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데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을 듯 한다.
경향신문의 '노동이 녹아 내린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으면서, 몇달전 '이건 독일 얘기네'라고 던져두었던 울리히 벡이 떠올랐다.
우리 사회 역시도 이면에서 사람들의 의식을 규정하고 긍정적인 모습으로든 부정적인 모습으로든 사회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울리히 벡이 정의한 바로 그 위험의 '사회적 형태'일지도 모른다.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이 땅에서 ‘비정규직’이라는 표현이 광범위하게 쓰인 지 20여년. 정부가 신규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주력하는 사이 비정규직이라는 단어에도 담기 어려운 ‘비정형 노동’이 하루가 멀다하고 생겨나고 있다.
하나의 일자리는 이제 ‘일감’ 단위로 잘게 쪼개진다. 소위 ‘마이크로 노동’이다. 이러한 종류의 노동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라는 인공지능(AI) 학습데이터 수집 작업에서 쉽게 확인된다. 작업자들은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플랫폼 기업의 지시에 따라 마우스 클릭만 몇 번 하면 그만이다. 숙련된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노동이지만 일하는 만큼 돈이 들어온다.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기에 육아와 병행할 수도 있다. 대신 휴가지에서도 일을 해야 하고, 거의 매일 장시간 노동을 해야 이 일로 생활을 할 수 있다. 회사가 주는 유급휴가나 4대보험 등 사회안전망도 없다."
일은 IT 시스템 또는 AI가 하고, 사람은 전처리 또는 후처리만 수행하는 파편화된 노동의 세상에서 자본이 아니라 노동이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노동가치설'은 설득력을 잃는다. 물론, 여전히 노동가치설을 신봉하며 자본과 노동의 대결 구도에 천착할 수 밖에 없는 분들에 대해서는 가슴으로 공감하지만, 그분들이 직면할 (고 정운영 선생이 제시한) 실천적 이론 또는 이론적 실천의 난이도가 극단적으로 상승할 것에 대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양극화된 사회로 인해, 주거비와 생활비를 포함한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지만, 파편화된 노동으로 인해 중위 집단의 실질소득은 역시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사회의 변화 양상에 대해,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속성' 또는 '인류 역사의 법칙' 정도로 설명하기 보다는 울리히 벡이 제시한 '위험'의 한 국면으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제 '위험'을 인지하고 분석한 후 명료하게 정의해서 알리는 지식인의 역할이 더더욱 중요해 질 듯하다.
그런데, 이건 지식인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정의하고 자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요원한 바램인지도 모르겠다.
- 경향신문 기사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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