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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단상

목적어의 부재

by pied_piper33 2024. 10. 18.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에 대해 하이데거는 '목적어'의 부재를 지적한다.
'무엇을'이 빠져 있는 생각은 실체가 없다. 즉, '생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생각의 대상이 선행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세계에 내던져진(Geworfenheit, 彼投) 우리에게 그 생각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내가 만든 것들이 아니다. 설사 내가 만든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재료는 역시 주어진 '타자 또는 타인'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역시도 어머니라는 '타인'이 없으면 생겨날 수 없었다.
결국, 데카르트의 주장에 수긍하더라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의 출발점과 나의 본질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는 '타자'라는 결론에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지나온 세월과 그 세월을 통해 쌓인 나이테를 대답으로 만지작거리기 쉽지만, 그것만으로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
지금의 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내가 서있었던 좌표의 흐름을 누적하는 것으로 부족하다.
좌표점의 환경으로서의 x축과 y축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하고, 내가 서있는 그 한점 주변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다른 점들을 둘러볼 수 있어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소신' 또는 '확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점점 더 두려워지고 조심스러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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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함은 각기 그때마다 '나는 하나의 세계 안에 있다'로서의 '나'인 그런 존재자를 의미한다. 나는 '나는 사유한다' 일뿐만 아니라 또한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이다."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 어떤 것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 이해된다면 그것에는 무언 중에 세계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가 항상 '어떤 것을 생각하는' 자아라면 바로 세계가 '자아'의 존재구조를 함께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라고 말한다'고 말할 경우 자아는 이미 '나는 어떤 세계 속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박찬국, '존재와 시간 강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