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남원, 고광순이 일제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키면서, 근방에서 문장가로 유명했던 매천 황현에게 사람을 보내 격문을 부탁한다.
매천은 '격문이 있고 없고는 소용이 없다. 단지 노력이 필요할 따름이다'라고 일축하면서 거절한다.
격문도 써주지 않는 매천에 대해 고광순은 야속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고광순은 일제와의 싸움을 시작했고 지리산 연곡사에서 함께 의병을 일으킨 동지들과 장렬히 전사한다.
고광순의 전사 소식에 매천은 크게 슬퍼하면서 연곡사로 달려가서 고광순의 무덤을 만들고 뒤늦은 글을 남긴다.
"전마(戰馬)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까마귀 떼만이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는구나.
나 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거나"
일본의 압도적인 화력을 생각한다면, 싸우기로 결심하는 것 자체가 비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분연히 일어서야만 했고 그렇게 희망의 근거를 스스로 만들어가야만 했다.
고광순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불원복 태극기'는 주역의 24번째 괘 지뢰복(地雷復)에서 문구를 가지고 온 것이다.
不遠復 无祗悔 元吉
불원복 무지회 원길
"머지않아 회복된다. 사당에 엎드려 후회하지 않는다면 크게 형통하다"
불원복 즉, '멀지 않아 회복된다'라는 신념만이 고광순에게는 희망의 근거였을 듯 하다. 희망은 그렇게 스스로 근거를 만들면서 실천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암울한 시기에 사당에 엎드려 후회하는 행위는 티없이 맑은 양심을 가진 학자의 처신으로는 적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자기 위로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것만으로 희망의 근거를 찾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하다.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믿음'이 필요한 시기는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休復 吉
휴복 길
"싸우면서 회복한다. 형통하다"
시라카와 시즈카에 따르면 한자 휴(休)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표창하는 뜻이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휴가가 주어졌을 것이고 그래서 후대에 '쉬다'의 의미로 고착되었다. 주역이 쓰여진 시기에는 아마도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頻復 厲 无咎
"동지들의 장례를 치르면서 회복한다. 위태롭다. 하지만 허물이 없다"
한자 빈(頻)은 물가에서 장례를 치르는 걸 의미한다. 함께 싸우던 벗들이 하나둘 떠난다. 나 역시도 위태롭다. 하지만, 이걸 모르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中行 獨復
중행 독부
"곧게 앞으로 나아간다. 외롭지만 회복한다"
한자 중(中)은 깃발을 의미한다. 곁길로 새지 않고 깃발을 향해 곧게 나아가기 때문에 '가운데'라는 뜻으로 발전 되었을 듯 하다.
어두운 시기에 거대한 적과 싸우는 건 언제나 외롭다.
敦復 无悔
돈복 무회
"고귀하게 회복한다. 후회가 없다"
한자 돈(敦)은 일반적으로 '도탑다'라고 해석한다. 도타운 회복이라 잘 와닿지 않는다. 리하르트 빌헬름은 돈(敦)을 'Noble-hearted'라고 번역하면서, 군자는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사람이면 실수할 수 있다. 그 실수를 빌미로 주저 앉히려는 공격이나 유혹에 굴하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가야할 길을 가야하는게 옳다.
迷復 凶 有災眚 用行師 終有大敗
미복 흉 유재생 용행사 종유대패
"망설이면 큰 재앙이 닥친다. 군사를 일으켜도 결국은 크게 패한다"
한자 생(眚)은 재앙이라는 뜻과 흐리다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회복을 꿈꾸면서 도전하는 군자는 이미 재앙 속에 있다. 새롭지 않다. 하지만, 신념이 흔들리는 순간, 그 재앙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나만 혼자 이렇게 싸우는게 맞나...'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군자에게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뜻을 잃고 타협하는게 패배일 따름이다.
테드 창은 소설 '당신 인생 이야기'에서 나에게 닥칠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존재가 현재를 살아낸다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대화가 되었든 헵타포드는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지뢰복 괘는 땅 속에 우뢰가 숨어있는 형상이다. 우뢰가 있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우뢰이므로 우뢰의 증거를 내가 알고 있다. 입증이 불가능하지만 굳이 입증해야할 필요도 없다.
다만, 테드 창의 말을 빌어본다면,
곧 회복된다는 나의 신념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내가 일어나 싸워야만 한다.
고광순은 일어나서 싸웠다. 희망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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