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그의 문화인류학 4부작 중 하나인 책 ‘침묵의 언어’에서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와 해리 설리번의 이론을 비교한다
프로이트의 가장 큰 공헌은 데카르트가 주장한 더이상 의심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로서 생각하고 있는 나의 ‘의식’이 나를 규정하기 보다는 그 의식 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이 오히려 나를 더 크게 통제하고 조정한다는 걸 밝혔다는데 있다.
하지만, 무의식은 의식 저편에 존재하는 모호한 대상으로 어둠 속에 남아있으므로 체계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기 보다는 문제 행동의 파편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밖에 없는 한계를 노출한다.
설리번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해 의식 저편의 다른 층위에 위치한 무언가가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실제로 지배하는 여러 의식 중 하나로 정의하면서 깊고 어두운 심연에서 무의식을 구출한다.
설리번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긍정하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에게 존재하지만 원하지 않는 부정적인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모습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혐오스럽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긍정하여 자신에게 받아들여진 모습을 자신의 ‘의식적인 자아’로 정의하고 그 자아를 타인에게 노출하고 그 자아로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은 자기 자신에게 조차 은폐된다.
문제는 그렇게 은폐된 ‘자아’는 자기 자신에게만 은폐되어 있을 뿐 타인에게는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나라고 생각한 ‘나’와 타인에게 인식되는 ‘나’는 불일치하며, 그 불일치는 정확히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이라니.. 이건 꽤 섬뜩한 얘기로 봐야 한다.
기업의 경영진, 학교의 선생님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 등 누군가에게 끊임 없이 자신을 노출시키고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노출한 ‘나’와 실제로 노출된 ‘나’의 gap 만큼 커뮤니케이션의 오류가 발생되고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꽤 많은 기업에서 아무리 설명해도 원하는 변화가 발생되고 있지 않는다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리더들이 발견된다.
메시지는 메신저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의 통찰에 동의한다면 메신저로서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내가 지금 비언어적으로 어떤 말을 건네고 있는지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
물론, 그 성찰은 내가 거부하는 나의 부정적인 모습 그리고 감추고 싶은 나의 약점과 치부를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게 에드워드 홀에게 배울 수 있는 원포인트 레슨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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