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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즐거움

부패한 감정들을 담아내는 그릇

by pied_piper33 2024. 11. 12.
마음 속 어딘가에서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채 부패하고 있는 감정들을 명료한 문장에 담아 잔인하게 눈 앞으로 들이미는 소설을 만날 때가 있다.
이경란 작가의 단편소설 '다정 모를 세계'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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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의 알갱이가 몇 개씩 일정한 속도로 흘러내리듯 다정에게서도 무언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갔다"
→ 나에게 있어서 관계의 종말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게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지속되다보면 어느새 텅 비어버린다. 그리고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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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건 속는다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 속지 않으려면 믿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계속 믿고 계속 속는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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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우의 온도가 섞인 음악은 다정의 독립된 영역을 지워버린다"
→ 저 멀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말이 공간을 채우고 어느새 내가 마실 공기를 지워버리는 상황에 이르면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살려면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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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을 떨쳐내고 싶으면서도 완전히 사라질까 봐 불안해하던 심정이 그때는 절박한 진심이었고 지금은 하찮은 과거가 되었다"
→ 가끔 묻는다. '나는 이 고통을 떨쳐내고 싶어하는가?' '나는 이 지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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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하단의 공유 버튼을 터치한다. 간단하다"
→ 간단하다. 그렇게 간단하게 공유하고 숨을 쉬고 다시 후회하고 다시 녹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