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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단상

변화를 이끌어내는 피상성

by pied_piper33 2024. 11. 12.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12월 31일, 독일군에게 포위된 스탈린그라드에서 위문공연이 열렸다. 

 

바이올리니스트 골드슈타인의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독일군의 총격이 갑자기 멈췄다. 그렇게 첫곡이 끝나고 박수가 나오고 있을 때, 독일군 진영으로부터 확성기 음성이 들린다. 

 

"바흐를 계속 연주해주시오!"

 

연주는 다시 시작되었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양측의 군사들은 전투를 멈추고 바흐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총구가 불을 뿜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죽고 죽이는 살육이 이어졌다. 

 

2010년 남아공에서 흑백 차별 반대시위를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상황이다.

 

몽둥이를 든 백인경찰이 도망가는 중년의 흑인여성을 뒤쫓고 있었다. 흑인여성이 백인경찰에 붙잡힐 만큼 그들의 거리가 가까와졌을 즈음, 신발 한쪽이 벗겨지면서 흑인여성이 넘어졌다. 

 

백인경찰은 반사적으로 신발을 줍고 흑인여성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두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흑인여성은 다시 도망쳤고 백인경찰은 더이상 뒤쫓지 않았다. 

 

이 두가지 사례를 통해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려고 한 것은 위대한 예술의 힘도 아니고, 백인 경찰의 인도주의 정신도 아니다 (지젝은 백인 경찰이 뼛 속 깊이 인종주의자였을 것으로 간주한다. 인종주의자 백인 남성이 시선 교환 한번으로 갑자기 박애주의를 깨우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젝이 말하고 싶었던 건, 변화를 이끌어내는 '피상성'이었다. 

 

즉, 아름다운 예술에 잠시 감동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단편적인 'How'가 제시되지 못하면 감동은 감동으로 끝나고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자기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피상적이 예절교육이 그 순간 백인 경찰의 반사적 행동을 만들어냈고 결국 추격을 멈추게 만들었다는게 지젝의 해석이다. 

 

지젝이 워낙 논쟁적인 사상가이므로, 지젝의 해석에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명확한 것 하나는 구체적인 Action Plan이 없는 '감동적인 원칙'은 현실 공간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발견했다면.. 물이란 무엇인가, 왜 여름에는 익사사고가 발생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 보다는 밧줄을 찾고 던지는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할 따름이다. 

 

물론, 문제의 본질에서 출발한 원칙이 없다면 근본적인 대책이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다음에 근본적인 대책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어떻게 대책을 만들 것인지 어떤 논의를 어떻게 시작해서 어떤 결론을 도출할 것인지에 대한 Action Plan을 요구할 수 밖에 없다. 

 

원칙은 아름답지만 생각보다 많은 상황에서 비겁한 도피처가 될 수 있다. 

 

아비규환이 매일 반복되는 전쟁터같은 현실 속에서 심오하기만 원칙은 자체로는 '' 가깝다. 이게 억울하다면 원칙을 이야기할 표피적으로 보이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원칙에 직접 연결되고 성공과 실패 여부가 측정될 있는 Action Plan 제시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