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에는 대대(對待)라는 개념이 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서로 마주보며 기다린다' 정도가 되겠다.
빛은 어두움과 함께 존재한다. 어두움이 없이 빛은 정체성을 잃는다. 전기의 양극과 음극이 그렇고, 하늘과 땅이 이와 같다.
존재는 이렇게 완벽하게 다른 서로가 마주보면서 시작된다.
군사를 다스리는 전략(師)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8번째 괘 비(比)가 대대(對待)가 되어 실체적인 존재가 된다.
한자 비(比)는 갑골문에서 사람 두명이 함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친밀함이라는 뜻이 파생된다.
비 괘는 땅 위에 물이 있는 형상이다. 눈에 물이 보인다. 생명을 자라게하는 이 물을 어디로 흘러가게 해야할 것인가를 고민해야하는 상황에서 주역의 저자가 끌어낸 키워드가 '친밀함'이다.
주역은 친밀함을 발생시키기위한 선결 요건으로 믿음을 제시한다 (有孚比之 无咎).
즉, 믿음을 주지 않을 대상에게 친밀함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따뜻한 미소와 선한 눈빛으로 시작된 관계가 차가운 거절과 아픈 배신으로 끝나는 사례는 생각보다 많이 발생한다.
그래서, 주역은 내가 표리부동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을 줄 수 있는 대상에게만 친밀하라고 가르친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뒤로는 칼을 품는 전략은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원수'에게나 적합하다. 적이 아닌 타인 또는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는 못할 짓이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방의 의도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왔을 때 의도를 의심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다.
두번째 효를 통해 주역은 친밀함의 시작점을 제시한다.
친밀함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친밀하지 않고 멀리 있는 사람에게 더 집중한다면 기초가 약하다. 오래가지 못한다.
세번째 효에서는 믿음을 주고 친밀하게 대했음에도 배신을 당하는 상황이 충분히 발생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럴 수 있다. 발생할 수 있는 일이 발생된 것이니 대단하게 여길 것도 아니고 아프긴 해도 유독 나에게만 일어나는 엄청난 비극도 아니다.
그냥, 내가 정성을 기울인 저 사람이 인간이 아니었네(比之匪人)..정도로 생각하고 털어내고 친밀함의 가치와 힘을 계속 신뢰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친밀하게 대하고 나에게 친밀하게 대해주는 사람의 범위가 넓어진다(外比之 貞吉).
친밀함이라는 자원이 갖추어진 조직에서 구성원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는다. 이제 조직은 두려움없이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저돌성을 갖게 된다.
주역은 이를 왕과 신하들이 함께 사냥을 하다가, 사냥감을 놓쳐버렸으나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함께 즐거웠으면 그만이고 왜 놓쳤는지 분석해서 다음에는 더 멋지게 사냥하면 그만이다(王用三驅 失前禽 邑人不誡 吉).
이런 모습을 주역은 현비(顯比), 즉 친밀함의 발현이라고 이름붙이고 가장 높은 수준의 조직문화로 설명한다.
여기서 끝나면 주역은 수없이 명멸하는 처세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비괘는 마지막 여섯번째 효에서 부작용을 지적한다. 친밀함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경우, 리더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결국 망한다고 경고한다.
조직의 구성원은 지위가 아니라, 기능으로 역할이 나뉘어야 한다. 지위로 구성원에게 명찰을 붙인 조직은 친밀함의 강화는 상하관계의 붕괴로 이어지고 지위에 의해 움직이고 있던 메커니즘이 망가진다.
반대로, 명확한 기능에 의해 구성원 각각의 아이덴티티가 부여된 조직은 친밀함의 강화는 메커니즘의 붕괴가 아니라 팀워크의 강화라는 매우 상반된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
친밀함의 전제 조건인 믿음이 작동하려면, 구성원에게 적절한 기능이 부여되어야 하고 구성원은 자신의 기능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리더는 그 기능에 대한 존중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조직은 지위에 의해서 움직일 수 밖에 없으며 친밀함의 강화는 조직력의 붕괴를 초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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