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을 가지고 시작하였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고(둔 屯),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듣는 귀를 갖게 되면(몽 蒙)..이어지는 다음 수순으로 기다림의 단계(需)에 도착한다.
주역의 5번째 괘 수(需)는 하늘 위에 물이 놓여 있는 형상이다. 물이 막고 있으니 하늘이 더 위로 나아가지 못한다.
즉, 기다림에도 여러가지 유형이 있겠으나, 수괘의 기다림은 불가항력 상황에서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인내하는 기다림이다.
이 기다림 속에서는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우선 들(郊)에서 비를 맞는다. 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중심지(邑)에서 벗어난 지역이다. 경쟁에서 밀려나 초라하게 도착한 들에서 차가운 비를 맞는다.
다음은 모래밭에서 비를 맞는다. 모래밭을 지나면 시퍼런 강물이 있다. 위험에 더욱 더 가까이 간다.
상황은 더 악화되어 진흙 뻘 속으로 들어간다. 진창에 발이 빠져 오도가도 못하는데 설상가상으로 도둑이 나타난다. 도둑은 강자를 피해서 약자를 괴롭히기 마련이다.
피투성이가 된다. 누군가 음식을 준다. 먹고 힘을 차린다. 또 세사람이 나타난다. 이 세사람이 나에게 고마운 사람인지 아니면 나를 괴롭히는 강도인지 알 수 없다.
주역은 '기다림'의 시간을 아름답게 묘사하지 않는다. 깊은 산 속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신선의 기다림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다림의 시간은 아비규환의 연속일 따름이다.
하지만 주역의 저자는 이 '기다림'에 대해 괜찮을 뿐만 아니라 크게 형통하다고 설명한다(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강을 건너려면 강에 다가가야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겪는 고난은 예정된 수순일 따름이다.
단, 이 상처뿐인 기다림의 시간이 의미있게 되기 위한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문제는 내가 잘 풀릴 것이다라고 생각할만한 구체적인 근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거가 있는 상태에서 확신을 하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판단'이다.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할만한 근거가 없는 시기에 믿음은 가치를 발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시간을 지나는 동안 나를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건, 근거없는 믿음 하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렇게 나를 이유없이 믿어주는 사람이 언제나 더없이 고맙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떠오르는 몇몇 얼굴과 이름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기다림은 믿음이 있다면 크게 형통하다. 이제 강을 건널 수 있게 된다.
'주역과 CEO'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역과 CEO 9, 26 - 풍천소축 風天小畜, 산천대축 山天大畜 (0) | 2024.04.04 |
---|---|
주역과 CEO 8 - 수지비 水地比 (0) | 2024.04.04 |
주역과 CEO 7 - 지수사 地水師 (0) | 2024.04.04 |
주역과 CEO 6 - 천수송 天水訟 (0) | 2024.04.04 |
주역과 CEO 3, 4 - 수뢰둔 水雷屯, 산수몽 山水蒙 (0) | 2024.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