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은 구체제를 변혁시키는 위대한 효과를 발휘했던 동시에 공포정치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지즈카 다다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암세포를 없애기도 하지만 환자에게 죽음과 같은 고통을 가할 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하는 항암제와 같은 극약으로 정의한다.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왜 이런 극단적인 사건이 발생했을까?
지즈카 다다미는 경제의 성장/위축과 부르주아 계층의 혁신성이 연결된 재미있는 가설을 제시한다.
부르주아는 기층 대중과 신분적 차별에 대한 울분은 공유했지만 성직자와 귀족이 지배하는 구체제를 뒤집어 엎고 싶어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한가지 더 있었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걸맞는 부의 축적에 구체제가 방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가 동일했다. 하지만, 식민지 쟁탈전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세계에 널리 뻗어가는 식민지를 기반으로 경제가 계속 성장하는 영국의 부르주아는 더 큰 열매를 누리기 위해 체제 변혁에 더 적극적이었던 반면, 영국에 눌려 경제성장이 정체될 뿐만 아니라 밀려 들어오는 영국 상품으로 인해 기존에 누리던 기득권 조차 잃어버릴 위험이 커지던 프랑스의 부르주아는 혁신성에서 한발에서 물러나 돈으로 귀족의 자격을 구입하여 구체제에 안주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런 서로 다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영국의 부르주아는 굳이 왕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구체제의 폐지를 선도하게 되고, 프랑스는 기층 대중이 먼저 나서서 혁명을 촉발시켰고 부르주아가 그 위에 올라타는 형국을 띄게 되면서 연착륙의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연착륙의 실패는 공포정치라는 비극으로 귀결되었다.
‘성장’은 웬만한 상황에서는 사회의 건강함을 지켜주는 그 자체로서 절대선이기 쉽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그의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한가’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에 심정적으로 공감하는 것과는 별개로,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성장이 멈추는 순간부터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비효율과 상상치 못한 부조리에 대해서 피하지 말고 똑바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기업'에게도 성장은 그 자체로 '진리'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매년 성장을 목표로 인력과 예산을 재배치하고 실험하고 실행하면서 '성장'을 위한 잔근육을 만들고 그것이 구성원의 DNA에 장착되도록 하지 않을 경우,
아주 운이 좋으면 프랑스 혁명과 같은 피흘리는 혁신의 상황에 내몰리게 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피만 흘리며 고통스럽게 사라지는 수순을 밟게 된다.
내가 몸담고 있는 기업이 왜 성장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공담대를 형성하는 수단으로서의 'vision 수립'과 그 vision을 의사결정의 순간 순간마다 반영하여 구성원으로 하여금 그 'vision을 믿게 만드는 행위'는 이윤의 창출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목표에 부합되는 경영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너무나 많은 기업은 그 과정을 생략하거나 '요식행위' 수준에서만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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