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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를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회의실의 풍경

by pied_piper33 2024. 11. 26.

A본부에서 보고를 하겠다고 왔다. 

 

'기-승-전-결'이 갖추어진 구성이 괜찮다. 내가 궁금한 것을 발표자에게 질문을 한다. 발표자의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한다. 본부장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몇번의 대화가 주고 받아진 후에 본부장이 대표님께서 피드백 주신 내용을 반영해서 다시 발표하겠다고 얘기하고 나간다.

 

B본부에서도 보고하러 들어왔다.

 

뭔가 허술한 구석이 보이기는 하는데, 발표자는 입에 침을 튀기면서 열심히 설명한다. 내가 질문하기 전에 본부장이 발표자에게 질문한다. 내 앞에서 발표자와 본부장의 논쟁이 시작된다. 내가 질문할 틈을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싸운다. 불구경 싸움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하지 않나.

 

C본부가 뒤이어 보고하러 들어온다.

 

본부장이 직접 발표하고, 실무자가 중간중간 끼어들어서 돕는다. 내가 질문한다. 본부장과 실무자가 서로 답변을 하고 싶어한다. 질문과 답변이 여러 차례 오고가는 동안 배가 산으로도 가고 들로도 간다. 

 

A본부의 경우는 대체로 짜고 치는 고스톱인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어떤 논의가 오고 갔는지에 관계없이 보고를 위한 보고를 준비해서 발표를 하기 때문에, 한단계만 깊게 들어간 질문에도 발표자는 본부장의 허락없이는 시나리오에 없는 답을 말할 수가 없다. 보고를 준비하고 발표하는 모든 과정이 회사의 자원을 낭비한 것이다. 몇달에 걸쳐서 이러한 보고가 반복되면 본부장 교체를 고려한다. 

 

실무 팀장이 자신의 논리와 신념을 강하게 주장하는 경우에는 B본부와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본부장은 완벽하게 동의하지는 않지만 딱히 논리적인 결함을 찾기도 어렵기 때문에 대표에게 발표하도록 내버려두지만 마뜩지는 않다. 본부장과 실무 팀장의 논쟁을 듣다보면 나 역시도 사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된다. 물론 제3자가 관찰을 한다면, 대표 앞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이니 난장판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무 팀장이 탄탄하게 고민을 하고 준비를 했다면 그리고 본부장이 개인의 감정을 배제하고 논리적으로 공격하기만 한다면 매우 가치있는 시간이 된다.

 

본부장의 방향에 실무팀장이 완벽하게 부응해서 결과물이 나오면 C본부와 같은 장면이 나타난다(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이사 방에 들어오기 전에 충분히 내부 토론을 했기 때문에 내가 누구에게 어떤 질문을 해도 막힘이 없다. 이런 상황이 되면 오히려 내 쪽에서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심이 생긴다. 비교 대상이 없는 한쪽의 주장만 나에게 펼쳐졌을 때는 의사결정 하기 어렵다. 최대한 집요하고 잔인하게 파고들어서 지적하고 질문한다. 공격을 견디어 내고 나를 설득을 해도 성공이고, 공격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이슈가 발견되어도 성공이다. 

 

B본부와 C본부 중에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 본부장의 리더쉽 스타일의 차이일 수도 있고 본부장이 같더라도 실무 팀장의 성향에 따라 다른 진행을 보일 수 있다. 

 

문제는 A본부이다. 평생 Role Play로 성공해서 본부장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들은 시장과 승부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으니, 멋진 Performance로 대표의 칭찬을 얻어내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들이 만든 무언가를 시장으로 들고 갈 수도 없고 설사 시장에 내놓는다고 해도 디테일에서 너무나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가장 심각한 것은 A본부장과 같은 성향의 리더들은 왜 자신이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명히 대표님의 피드백을 반영했는데 왜 B본부장과 C본부장을 더 신임하고 그들에게 더 많은 자원을 배분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우니 억울한 마음이 쌓일 수 밖에 없다.

 

Role Play 전문가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업은 머지않아 시장으로부터 버림받는 운명에 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