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소련 침공이 임박했다는 첩보가 스탈린에게 수없이 전달된다.
스탈린은 '그럴리 없다'면서 모두 무시한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공격을 개시하고, 스탈린은 독일 장군들의 자의적인 도발으로 간주하면서 응전을 삼가하도록 지시한다.
독일대사 슐렌부르크로부터 선전포고를 전달 받고서야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인다.
주코프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독일의 선전포고를 들은 스탈린은 말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에 잠겼다. 길고 고통스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스탈린은 결국 침공한 적에 대한 살상명령을 내리지만 당황스럽게도 군대에 전달되는 명령서에는 서명하지 않는다. 명령서는 군통수권자인 스탈린이 아니라 티모셴코, 말렌코프, 주코프의 서명이 달려있었다.
사실, 스탈린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민은 독일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 인민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알리느냐였다. 참모들은 스탈린이 직접 나서서 인민들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역시 스탈린은 이를 거부한다.
독일과의 전쟁은 스탈린이 아닌 외무상인 몰로토프의 연설로 인민들에게 전파된다. 그리고 소련군에게는 두번째 명령이 내려진다. 적을 섬멸하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 명령서에도 스탈린은 서명하지 않는다.
이제 전쟁을 수행할 총사령본부가 꾸려진다. 스탈린은 총사령본부의 리더가 되기를 또 거부한다. 국방 인민위원인 티모셴코가 책임을 맡는다.
전쟁이 시작되고 일주일이 경과된 6월 30일 스탈린은 자취를 감춘다. 스탈린을 찾기 위해 난리가 벌어졌다. 스탈린은 개인별장 다차에 머물고 있었다.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국가지도자의 부재를 방치할 수 없었던 소련의 리더들은 다차에 찾아가기로 결정한다.
문제는 초청받지 않은 상태에서 다차를 찾아갔다가 무기력하게 우울해하고 있는 스탈린의 모습을 목격하는게 두려웠고 이유를 추궁하는 스탈린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숙청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탈린의 방문을 두드릴 그 한명을 뽑지 못한 그들은, 단체로 찾아가서 전쟁 수행을 감독할 최고통치기구를 창설하자고 제안한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수락한다.
다시 크레믈린 궁에 등장한 스탈린은 인민을 향해 감동적인 첫 방송연설을 하고, 자신이 서명한 첫번째 명령을 군에 하달한다.
'소련의 방위실패는 서부전선군 사령관 드리트리 파블로프 장군의 지휘실책이 원인이다.'
파블로프 장군과 그의 부하들은 재판에 회부되고 총살된다.
이렇게 시작된 독소전쟁에서 소련 사람들은 2900만명이 죽는다.
최종적으로 전쟁은 소련이 포함된 연합군이 이겼을지는 몰라도 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가 연합국과 추축국을 합쳐서 5000만명 발생했지만 이중 58%는 소련 사람들의 몫이었다.
소련의 리더들은 개전 초기 다차로 도망가버린 스탈린을 끌어내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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