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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즐거움

밀린 숙제 - 헤겔 '정신현상학'

by pied_piper33 2025. 1. 26.

돈키호테가 읽은 줄 알았으나 실제로는 안읽은 책이고, 데미안이 읽었으나 안읽은 것과 다름없는 책이었다면,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밀린 숙제에 해당한다.

오래 잊고 있었으나, 디디에 에리봉이 지은 미셸푸고 평전을 읽으면서 미셸 푸코가 철학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헤겔과 정신현상학이 마련했다는 내용을 접하고 나서는 더이상 미뤄둔 채로 내버려둘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읽지 말아야 할 이유도 충분히 있긴 했다.

버틀란트 러셀의 얘기를 들어보자.

"헤겔의 학설 대부분이 거짓이라 해도, 그는 역사적인 면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는 정합성과 포괄성이 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철학 체계를 세운 자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다시 풀어쓰면, 헤겔은 정합성과 포괄성이 떨어지는 엉터리이지만 따르는 바보들이 많기 때문에 철학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러셀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명백한 오류에서 헤겔 체계의 당당해 보이는 전체 구조가 형성된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 진실, 즉 논리가 형편 없을 수록 거기서 생겨난 귀결은 더욱 흥미롭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헤겔의 당당한 체계에 대한 비난이 이보다 더 신랄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읽어야 하는 이유도 적는게 공평하겠다. 메를로 퐁티는 헤겔을 이렇게 변호한다.

"헤겔의 후계자 중에는 자신이 헤겔에게 빚진 것보다는 그의 유산 가운데에서 자신이 거부하고 싶은 것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헤겔의 근원을 잊으려는 배은망덕한 이론들을 헤겔과 다시 연결시키는 것보다 더 시급한 작업은 없다"

또, (나를 다시 헤겔로 이끈) 미셸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헤겔에 대항하여 사고할 때조차 그것이 여전히 헤겔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를 상대로 한 제소가 실은 그가 우리에게 마련한 계략이며 그 끝에서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인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러셀이 말한 대로 오류 투성이에 겉모습만 번드르르한 이론이니 미련을 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메를로 퐁티와 미셸 푸코를 매혹시켰던 (러셀의 비판 조차도 포괄한 듯한) 헤겔 철학의 의미를 시간을 내서 느껴봐야 하는가..
이번에는 버틀란트 러셀이 졌다.
헤겔을 옆구리에 꽂고 교정을 걸어가던 선배들의 모습을 부럽게만 바라보던 90년대의 그날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시간 부자가 되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밥 안먹어도 배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