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이런 비문이 쓰여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소설가이면서 정치가였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문장으로 기록될 비문을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비로소 자신이 자유롭게 되었다는 선언으로 대체한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자유'는 허울 뿐이다.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장자의 '추수편'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공자와 자로가 괴한으로부터 포위 당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태연히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보다못한 자로가 공자에게 '선생님은 어떻게 이 상황을 즐기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공자는
"나는 궁핍함을 벗어나보려고 오랫동안 애썼으나, 결국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게 내 운명이었겠지. 또 나는 형통하기를 오랜 세월 꿈꿔왔지만, 결국 얻지 못했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시대였던거지."
"그러니, 큰 난리를 만나도 그게 내 운명이고 내가 살고 있는 시대라는 걸 알고 받아들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어서, 운명과 시대를 받아들임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과 시대는 과연 무엇인가?
장자는 운명을 命이라는 글자로, 시대는 時로 표현하고 있다.
운명..
命은 令과 口가 합쳐져서 만들어졌으며, 令은 모자를 쓰고 신에게 기도하며 신의 계시를 받는 사제의 모습을 상형한 것이고, 口는 신에게 올리는 축문을 넣는 그릇의 모양이다. 즉, 기도를 통해 내려받은 신의 명령을 의미한다. 장자에게 '운명'은 거대한 힘에 의해 일방적으로 나에게 강요된 것이라기 보다는, 불확실성에 처한 내가 신에 물어서 얻은 '계시'를 의미한다.
시대..
時는 세월을 의미하는 日과 '잡다/쥐다'에서 출발해서 지속하다의 의미를 갖게 된 持가 합쳐져있는 글자이니, 지금의 세월 또는 지금의 상황의 지속을 의미한다.
종합해보면, 운명(命)과 시대(時)라는 것 모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들이다. 두려워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두려워한다고 해서 딱히 얻을 것은 없는 것이다.
즉, 운명과 시대를 받아들인다는 건, '주지 않겠다면 나는 받지 않겠다'는 '축복의 거부' 선언에 다름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축복과 심판의 종교인 기독교 문화에서 성장하고 살아온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비문 역시도,
죽음을 앞두고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서 "신이시여 당신이 내게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내가 굳이 매달려 갈구하지 않으렵니다. 그러니, 나는 당신을 두려워해야 이유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이제 자유롭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축복의 거부'인지도 모른다.
축복을 거부한 자의 당당한 가슴에는 두려움이 또아리를 틀 공간은 애초에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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