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수 있는 희망조차 없는 사람들,
이들의 맹목적인 삶은 너무나 낮아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질투한다
Questi non hanno speranza di morte,
e la lor cieca vita è tanto bassa,
che 'nvidïosi son d'ogne altra sorte"
(번역 지어선)
단테는 지옥문을 지나서, 천국으로부터 쫓겨나고 지옥으로부터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람들의 절규를 듣는다.
베르길리우스는 이들에 대해서 '죽을 수 있는 희망조차 없다'라고 일갈한다.
여기서 '없다'를 표현한 non hanno는 수동형이 아니라 능동형이다. 따라서, 희망을 이들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저승에서 이들에게 능동적인 선택권이 주어졌을리 없다.
그렇다면, 시작은 이들의 거부였지만 결국은 무력하게 죽음을 통한 종결조차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능동적 무기력' 상태라고 해석하는게 합리적이다. 따라서 희망을 잃었다 (수동형), 희망을 버렸다 (능동형)이 아니라 '희망이 없다'로 번역하는게 최선이라고 본다.
이들은 어떤 사람인가?
"신에게 반역하지도 그렇다고 충성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했다 che non furon ribelli né fur fedeli a Dio, ma per sé fuoro"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 사람이 이념과 사상 또는 진리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폭력적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했다는 것으로 형벌을 받아야 한다니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신을 단테가 살던 시기의 관점에서 '절대 선'이라고 해석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게 된다. 즉, 신에게 반역하지도 충성하지도 않았다는 건, 스스로가 가진 판단기준의 부재를 의미한다고 보는게 맞다. 단테는 신을 믿지 않은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 신을 거부하고 반역하던가 따르던가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어떠한 결단도 없이 시류를 영합하기만 했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어떤 형벌을 받았는가?
"다른 모든 운명들을 질투한다 che 'nvidïosi son d'ogne altra sorte"
인간은 선택의 동물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선택의 집합체이다.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부재 상태에 빠진다. 나의 부재 상태에서는 나보다 나아보이는 모든 타인이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된다. 자아 정체성이 없는 사람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타인에 대한 부러움이다. 내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어도 어떤 작은 면에서라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은 존재한다.
자아부재 상태인 그들 타인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면서 스스로 영원한 형벌에 괴로와 할테니 지옥의 형리가 이들을 굳이 고문할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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