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를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저주로서의 '질문' 행위
pied_piper33
2024. 12. 2. 07:57
명료하지 않고 이해불가능한 말을 반복하면서 상대를 파멸로 유도하는 언어 행위를 '저주'라고 정의해보자.
어릴 때 읽은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얘기인 것 같으나 우치다 다츠루는 책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에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집요하게 가하거나 당하는 방식으로의 '저주'는 여전히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뭐가 마음에 안드는지 분명히 어서 말해!"
→ 말할 수 없으니 말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며 다그치는 사람은 주로 강자이고 말 못한 사람은 약자이니 이런 질문을 받아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은 지속되기 마련이다.
"너 나를 깔보는거냐?"
→ 역시, 강자만 약자에게 하는 질문이다. 깔보지 않는다고 대답해도, 깔보고 있다고 대답해도 약자는 더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
"결혼 안해?", "왜 아이를 갖지 않는거니?"
→ 결혼 못하고, 아이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다. 그 복잡한 이유를 설명해도 공감해주지 않을 법한 사람들이 주로 이런 질문을 한다. 역시 답하기 어렵다. 답해도 질문이 중단될 가능성은 없다.
"너는 누구를 닮아서 공부를 이렇게 못하니?"
"너 왜 이렇게 살쩠어?"
"너 또 왜...?"
"너는?"
"너는?"
:
: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 앞에서, 현실적으로 질문 받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변명'의 나열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침묵으로 수렴된다. 문제는 이러한 저주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이 '저주'의 말을 퍼붇고 있음을 일반적으로 모른다는데 있다.
동료로서, 친구로서, 배우자로서, 부모로서 걱정하는 말의 형태로 전달되지만 듣는 사람의 말문을 막으면서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을 끼얹는다.
상처가 쌓여가고 결국은 관계가 깨진다.
우치다 다츠루는 이렇게 지적한다.
"실제로 타인을 사랑하고 그 형편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마음과 타자를 결박하는 저주의 말 사이에는 정말 짦은 거리 밖에 없다", "어디까지가 훈육이고 어디부터가 '저주'인지를 누구도 엄밀하게 구분할 수 없다"
우치다 다츠루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저주의 말을 비수처럼 꽂는 이유를 ‘절제되지 않은 커뮤니케이션 욕구’로 설명한다.
상대를 좋아하기 때문에 뭐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은 선한 의도로 출발하지만, 그 말의 내용에 대해서 잠깐 멈추고 '생각'하는 과정이 없을 경우, 무심코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주제로 삼게 되고 결과적으로 '저주'의 커뮤니케이션이 된다.
이를 어쩌나..
내가 저주의 흑마술을 남발하는 가가멜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선의로 출발한 나의 말이 언제든 저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잘못된 커뮤니케이션을 중단하고 대화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반대로 저주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누군가의 조언으로 뭐라고도 대답할 수 없는 내가 '깊은 피로감'과 ’무기력함‘을 느끼는 경우, ‘저주'를 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 관계에서 벗어나는게 필요하다.
'저주'는 동화책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